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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완전 소실. All System Linked. Noradrenaline Gate Opened.
All Prerogatives are Allowed on Limbic System and Cerebrum. System Engaging. 첫째로, 저는 정말 교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제 기독교 철학관을 피력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쪽이 더 납득이 잘 가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본인이 그렇다고 한다면야 뭐라고 하겠는가? 주제넘게 제 멋대로 필자를 가여운 인간이라 동정하면서 구원자인냥 하고 필자를 '일깨워줘야한다.' 라고 해놓고서 이제와서 발뺌 하겠다는건가? 인간인 이상 별수 없겠지만 아전인수에 표리부동도 그 정도라는 것이 있을터. 불쾌하기 그지없다. 길가던 멀쩡한 사람 아무나 잡아놓고 '당신이 불쌍해 보여요. 동정해 드릴게요.'라고 지껄여보라. 그러고 보니 필자는 글쓴이 외에도 그런 부류를 만난적이 있다. 귀가길에 한 남자가 필자를 세워놓고 말하길 "도를 아십니까? 당신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입니다." 라고. 이런 부류에게 필자가 해줄수 있는 말은 한가지. 여지없이 뱉어냈다. "당신도 만만치 않은것 같습니다." 기독교 철학관, 소개로서 피력하는것은 얼마든지 하라. 머저리가 아니고는 태클걸 인간은 없다. 그러나 그 안량한 잣대를 아무나 잡고 대갈통을 까부수고 쑤셔넣으려 들지 말라는 말이다. 필자를 보고 도덕관과 같이 시대와 사회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인류사의 거대한 현상에 대해 지극히 편협한 시각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쭉 말해왔지만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여지껏의 글들은 미치도록 작디 작은 수십억개의 세계중 하나인 필자의 세계이다. 웃기지도 않게 세계는 하나라는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주장을 하면서 자신의 둘레 60cm 무게 1700g 가량의 세계만이 진실인줄 알고있는가? 철학자들이 한 세상 번뇌하고 지껄이고간 별볼일 없는 말 몇마디 가져다 쓰면서 철학을 한다고 하기에는 기본적 소양이 없다. 이러니 필자가 실념론에 가득찬 중세 교부철학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언제 필자의 세계를 강요했던가? 도대체 지금 그 안량한 잣대를 절대적 진리인냥하며 보편화 시키려고 하고있는 인간이 누구란 말인가? 글쓴이는 자신의 그 작디 작은 세계가 진실(객관-보편)이거나 진실에 더 가깝다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하고있는것 같다. 한 가지 충고해두지. 세상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극단적으로 작다. 칸트 운운해댔으니 잘 알테지. 기본적으로 세상은 인간의 오성의 창조물이다. 결국 넓디 넓은 세상일 지라도 둘레 60cm 무게 1700g의 기름덩이일 뿐이다. 일단, 제 글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듯 싶습니다. 자꾸 주변적 요소만 파고 드시는데, 제가 한문장으로 제가 하고자 했단 말을 다시 알려 드리지요. 그것은, "덕목이란 선한 의지가 없이는 덕목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위험분자님을 위해서 쉽게 풀이하자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착한 일' 이라는 것은, 비단 그 행위뿐만 아니라 동기 조차도 '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안다. 알고 있으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잖은가? 앞서 지적했지만 필자는 계속해서 '행동의 동기' 자체를 말하고있음에도 글쓴이의 주장은 그 당위가 의심받고 있는 명제 자체를 끌어와서 자기언급과 순환논리라는 저급한 논리오류에 빠져있다. 아니면 필자는 처음부터 쭉 행동 동기를 논해왔음에도 글쓴이 혼자서 따로 놀고있다는 말밖에 안된다. 위험분자님이 이 주장에 대해 counterargument를 내 놓고 싶으셨다면.. 그것은 과연 덕목을 덕목답게 만드는 객관적 선이란 존재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셨어야 옳은 순입니다. 그런데 자꾸 헛다리만 짚으시는군요. 물론, 위험분자님이 행동의 근본을 논하시기는 했지요, 그걸 너무 축소주의적으로 논해서 문제이지만... 프로이드도 인간 행동의 근본을 논하기는 했습니다. 일부 병리적 예를 들어서 전체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였지만 말입니다. 위험분자님이 하시는 행동도 그다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덕목의 발단이 칭찬받고 싶어하는 욕구라고 단정 짓는 그 축소주의가 말이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치판단이라는 하위 카테고리에서 축소론을 펼치며 자기언급과 순환논리에 빠져 헛다리 짚고있는것은 그쪽이다. '객관적 선'을 논하고 싶은가? 솔직히 논하고 싶진 않지만 견지나 밝혀두겠다. (진짜 철학을 한다면 한번쯤 책을 뒤져보길) 그딴게 존재할리가 있나? 쭉 말했듯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절대적 객관은 없다. 600년전 실념론이 유명론과의 충돌로 결단났음에도 불구하고 격세유전의 탓인지 간혹 이런 유니크하기 그지없는 주장을 하는 중세의 유물들이 등장한다. 프로이드에 관해서는 언급의 필요도 못느끼겠다. 필자는 프로이드도 아니고 프로이드라던지를 숭배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프로이든가 하는 작자의 의견을 대변해줄 의무라던지도 없다. 필자는 덕목의 동기는 '칭찬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포함한 홉스와 비슷한 개념의 이기심의 다양한 변형이다. 어느것이 우선하느냐는 개인차라고 덧붙인다. 그나저나 축소론, 축소론 하는데, 그 근거가 뭔가? 동기라는 상위 카테고리를 논하면서 하위카테고리인 가치판단을 개입시켜 진정한 축소론을 펼치는 이가 누군가? 아니면 또 '그럴 리가 없잖아.' 따위의 생떼를 쓸것이라면 집어치워주길 권고한다. 아, 여태까지 덕목의 동기가 착해야 덕목이라는 둥의 하위카테고리 맴도는 말빼고는 반론을 본게 하나도 없으니 이게 대체 뭔짓인가? 저는 마치 '덕목' 처럼 보이는 어떤 행동이 탐욕에서 비롯도된 위선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진정한 '덕목' 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수음에 대해서 말씀 하셨는데... 제가 보기로는, 위험분자님의 매우 유니크한 도덕관이야 말로 수음의 성격에 더 근접합니다. 애당초에 '그것은 진짜 덕목이 아니다' 같은 전제를 세워두니 나오는 결과가 이런거다. 그래서 필자가 그 당위를 물으면 여태껏 돌아온 답이 이거다. '그럴리가 없잖아요. 덕목은 그 동기자체가 선해야해요.' .......다시 하위 카테고리로 리턴이다. 메타언어(카테고리)에 대한 몰이해가 불러온 순환논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그렇다. 이것은 수음이다. 둘레 60cm 무게 1700g의 기름덩이속, 골방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음이다. 칸트니 바울이니 홉스니 하는 인간들과 필자 스스로까지 포함해서 작디 작은 기름덩이속에서 한 세상 번뇌했던, 하고있는 이들을 일컬어 '수음한다' 고 말하는 것이다. 필자의 개념에서 댁도 예외는 아니지만 너무 개념치는 말라.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다. 수음을 대신해 연구라고 하건 철학이라 하건 그것은 자유다. 홉스를 말씀 하셨는데, 혹시 정 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록Locke은 읽어 보셨습니까? 저는 홉스가 정부와 국가에 대해서 재미있는 말을 하기는 했는데, 저는 그가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충분히 사유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에고이즘은 그의 국가관을 뒷받침 하기 위한 그냥 당연한 premise에 지나지 않습니다. 잘 안다. 그보다 역으로 하나 물어보자. 로크를 제대로나 아는가? 로크의 철학을 일일이 논하긴 힘드니 정치적(국가론적)행보를 제외한 몇가지만 말해주겠다. 경험적 인식론의 창시자로도 불리는데(근거는 없다는게 개인적 견해) 칸트와 비슷한 오성을 통한 경험적 인식과 관념의 분류를 번뇌했다. 그러나 그 경험적 인식에서 신이라는 오성을 초월하는 존재를 설정함으로서 철학적 한계를 크게 들어낸 인간이다. 후에 그의 제자인 톨랜드가 그 신학적 제약을 걷어냄으로서 프랑스 유물론과 경험주의 인식론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었다. 자꾸만 '성현'에 집착하는 것 같은데, 그들도 단순히 한 세상 번뇌하다간 필자를 포함한 범부나 하나 다를것 없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논리가 진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리에 좀 더 가깝다고 할수도 없다. 자신의 글에 권위를 싣기위한 노력인지 부던히도 아전인수격으로 고르고 골라 끌어엎어놓는 모양새다. 홉스에 대한 글쓴이의 평가는 자유다. '아니야. 홉스는 위대한 철학자고 옳아.' 라고 주장해줄 홉스와의 우정이나 동경따위는 필자에겐 없다. 개인적으로도 높이 사지도 않는다. 그건 칸트니 바울이니 하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도 진실을 목격한, 뭔가 다른 인종이 아니라, 이 작디 작은 골통으로 수음하다간 범부일 뿐이다. 제가 제 반론을 위험분자님의 포스트에 답글로 붙이지 않고 제 블로그에 독립된 포스팅으로 붙인 것은, 제 블로그를 찾아 주시는 여러 사람들에게 위험분자님의 도덕관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제 도덕관에 공감하는 많은 이들을 가르킵니다. 거기에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느냐는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아, 이건 미안하게됐다. 개인적으로 그 작디 작은 세계를 보편화 시키면서 다른 사람도 마치 자신과 같은 세계에 산다고 착각하며 '우리' 운운하는 것을 불쾌히 여길따름이다. 단순히 동조하는 이들까지 아우른 말이라면 더이상 상관치 않겠다. 언어선택이야 자유일테니까. 그리고, 한가지 충고입니다만... 혹시 주변에서, 글이 어렵다거나, 알아 보지 못하겠다거나 하는 말들을 들은 적은 없습니까? 반론을 보면 그대로 반탄 반응을 보이는 타입 같은데, 소소한 부분에 반응하게 되어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되고, 글에 감정이 지나칠 정도로 표출되는것이 보이는군요. 저는 이 글이 좀 과격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듣는다. 일부 맞는 얘기긴 하지만 몇가지 얘기를 되돌려주면서 얘기해 보겠다. 그쪽이야 말로 글이 현학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지 않는가? 성현에 집착하며 그 몇몇 경구를 아전인수로 조합하는 것, 굳이 반론, 전제라고 하면될것을 counterargument니 permise니 하는것... 자신의 글을 권위적으로 보이기위해 부던히 노력하는듯 하다. 반탄 반응에 관해서라면 그쪽의 말에 하나하나 답해주느라 그런것 같다. 중복되는 부분도 많아 난잡한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필자가 답을 단 그쪽의 글도 난잡하다는 말이 아닐는지? 그리고 필자는 소소한 것에 반응하지만 그쪽은 아예 혼자 다른 콩밭에 튕겨나가 노는 경향이있다고 생각된다. 감정적이고 과격하다는 것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이런게 아전인수다...) 어차피 견해 차이고 굳이 따지자면 필자에겐 정의바보나 사랑바보같은 글이야 말로 과격하게 다가오니 말이다. 난 그쪽의 글이 불쾌하다. 애당초 가엾다느니 일깨워줘야겠다느니 하면서, 언어적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며 현상을 더 잘 설명 할수 있는 논리를 보이겠다면서 갖은 오만을 부리며 자기언급과 순환논리 따위 장황히 늘어놓고는 그 작디 작은 자로 남의 세계를 까부수려는 작태가 불쾌하다. 덕목이 싸그리 다 위선이었다면, 인류 사회는 이미 무너 졌습니다. 덕목처럼 보이는 일부가 위선일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체인양 호도해서는 안되지요. 그 근거가 뭔가?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를 향한 필자의 사랑도 위와 같이 정의한다. 그럼에도 누구 못지 않게 어머니께 사랑을 쏟아붓는다.(필자의 이기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필자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필자와 어머니가 만인의 상쟁과 같은 상황에 있느냐? 그렇지는 않다. 일반과 다르지않다. 다만 그 사랑의 정의가 다를뿐이다. 정의가 다르다고 뭔가 뒤틀리고 한 면은 하나도 없다. 글쓴이의 말대로라면 필자의 가정은 이미 파탄 났어야한다. 이 앞의 글에서도 말했듯, 백인백색이다. 다양한 세계에서 살아가고있다는 말이다. 그쪽이야 말로 그쪽의 세계만을 보편화 시켜서 독단을 내리지말라. 또한 진짜로 홉스의 저서를 읽어봤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서들은? 얼핏 생물학을 한다고 한것 같은데,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는 봤는가? 잘 짜여진 이기는 지고지순의 사랑 이상 일수도 있다.(필자의 세계에서 일뿐, 실제로 그 이상이라고 단정치는 않겠다. 글쓴이야 말로 자꾸만 혼자 단정지어 버리는 습성이 있는것 같아 덧붙인다.) -바깥양반- 위험분자님의 글에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 보다는, 감정에 현상을 맞추려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같은 감정이, 어떤 사람에게는 뽐내는데 쓰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향상심으로 쓰인다면, 그 감정은 가치중립적이겠지요. 그러나 그 중립적인 가치를, 일반적인 악덕이라 매도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봅니다. 글쎄, 그렇다면 당신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진실인가? 그것이 더 그럴듯 하다고 할수 있는가? 반대로 묻겠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당신이 어떤 설명을 가졌든 그 또한 당신의 둘레 60cm 무게 1700g의 작디 작은 세계의 잣대는 아닌가? 아니면 인간의 오성과 사고를 뛰어넘어 절대적인 잣대를 제시해줄수 있는가?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필자가 보는 눈이고 필자의 작디 작은 세계이다. 애당초 쓸데없이 절대 객관인냥 달려든 것은 Gandalf3쪽이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듯이, 이기심에서 덕목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든 덕목이 이기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좀 더 나은 존재라는 것이라는 직관이 아니라, 모든 덕목이 이기심에서 나온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로 이기심에서 도덕이 나온다는 소리가 논리 적으로 타당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죠. 아니, 받아들일 필요없다. 그런것을 제시할수 있는 절대적 객관은 없을테니. -다시 Gandalf3- 2. 먼저 이 논쟁의 시작은, 정치, 사회적 요소가 많은 영향을 끼치는 '도덕률' 보다는, 좀더 근원적인 "덕목" 들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거 봐라. 결국은 멋대로 저~멀리 콩밭으로 튕겨나가있다. 덕목의 성격이라는 것을 그 가치판단에 두고 있지않음에도 혼자 딴 얘기하고 있었다는거다. 카톨릭 교회와 기독교 철학이 이를 지지하고 있으며, 기독교 철학의 전신인 그리스 철학의 큰 줄기도 인간의 마음에 내제한 법에 대하여 매우 납득 가는 설명을 내 놓습니다. 문제는, 자연법, 혹은 내 마음의 도덕률을 언급 하다 보면, 저로서는 필연적으로 신론theism, 혹은 적어도 Deism(한글로 무어라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겟습니다)에 대해서라도 언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초 자연적' 이라는 컨셉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자연주의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을 끌어 내야 합니다. 판이 점점 더 커지는데... 골치가 딱딱 아프죠. 그런 설명이 있다면 왜 하지않고 순환논리나 펼치고 있었나? 사실 말했다해도 다를건 없다. 애당초 말했듯 난 당신이 뭘 믿든 내 세계에서 그것이 악이던 아니던 터치하지도 않는다. 당신이 그 안량한 잣대로 남의 세계를 까부수고 쑤셔넣으려는 우악스런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변증법에 관해서. 제논의 변증법을 아는가? 말그대로 그냥 변증법이다. 헴켈의 파라독스에 관한. 논리학적으로 볼때 대우명제의 증명으로 원명제를 증명한다는것이 변증법이다. '모든 까마귀가 검다'고 가정할때, 그 논리적 대우명제는 '까마귀가 아닌것은 검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란 송충이와 푸른 솔잎을 발견한것은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심지어 보라색 황소를 발견하는 것과 초록빛 외계인의 발견도 까마귀는 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이 헴켈의 파라독스이며 제논의 변증법이다. 즉 변증법 자체가 원명제와 전혀 무관한 명제만을 증명함으로서 그 정당성이 검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 교부철학부터 시작해 기독교의 대부분의 논리가 이런식의 변증법에 집착함으로서 쇄퇴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저는 도덕관의 축이 순수하게 정치 사회적 interaction으로 부터 솟아 나왔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탐욕이나 공명심 같은 악덕으로 부터 이타심이나 자기 희생과 같은 정 반대의 덕목이 솟아 나올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기심으로 부터 덕목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솟아 나왔다면, 그것은 덕목이 아니라 위선일 따름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위험분자님의 글이 제게는 그저 말장난 처럼 보이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난 상관치않겠다. 그러나 애당초 독단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면 왜 굳이 토론을 운운 한것인가? 이러니 단순히 오만하게 교화하려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글이 그냥 말장난 같아 보이는 것이다. 제 도덕관은 기독교 철학의 성격상 전 우주적이며, 따라서 많은 부분에 있어 비 타협 적입니다. 언제나 싸움 나기에 딱 좋지요=_=. 자신의 도덕관을 어떻게 평가하든, 내 말이 진리입네..그러니 믿어라... 는 것만 아니라면 개의치 않겠다. 그러나 비타협적이라니? 그러면 애당초 독단과 아집만이 있었다는 소린데, 그럼 역시 토론이 아니라 단지 남의 세계 까부수고 교화시키겠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한가지 경고하는데, 단순히 싸움나기 쉬운게 아니고, 이처럼 되지도 않는 독단과 아집으로 싸움을 걸고 돌아다니는 것 처럼 보인다. Ps.뒤의 몇몇 글들을 보니 진화론과 관련된 얘기를 하면서 당삼채와 진흙의 예를 들고있다. 만약 제가 한 뭉치의 진흙덩이와 화려하기로 이름난 청나라대의 도자기 당삼채를 들고 나와서, “여러분, 이 당삼채는 세공이 정교하고 무늬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그야말로 중국의 기품과 우아함을 상징하는 예술 작품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중화 미술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이 멋진 도자기의 본래 모습이, 여기 이 형체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진흙 덩어리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진흙덩이가 당삼채가 될수 있겠습니까?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등등의 열변을 토한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십중팔구는 제가 정신이 나갔다며 혀를 차시거나, 개중 친절하신 몇몇 분들은 저에게 진흙덩이가 당삼채로 변모하는 과정을 알려 주려고 하실테지요. 보잘것 없는 진흙덩이가 도공의 손길을 거쳐 우아한 곡선을 지닌 형태로 빚어 지고 세공이 가미되며, 유약을 바르고 초벌과 재벌을 거치며 엄청난 가치를 지닌 미술품으로 변모하는 그 과정을 말입니다. 만약 이러한 복잡다난한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도 제가 여전히 “진흙덩이를 당삼채로 바꿀수 있다니, 그런 허황된 소리 마십시오!” 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필히 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뉴런에 문제가 생겨서 분리된 과정들의 관계를 링크할수 없다거나, 아니면 좀더 심각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란다. 필자가 말하는 이기의 다양한 형태로서의 대죄들이 어떠한 기작과 꾸밈으로 덕목이나 선으로 화할수 있는 것인지...제대로 생각이나 해보던지, 꼭 저 글의 사람처럼 '이기가 덕목이 될수 있다니 그런 허황된 소리 마십시오!' 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더구나 댁은 필자가 '모든 진흙은 당삼채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으나, 필자는 '진흙은 당삼채도 될수 있고 볼품없는 밥그릇도 될수있다.' 라는 것이다. 행동의 원리가 이기에서 나오되 그것들이 모두 선이나 덕목은 아니다. 선과 악의 판단은 당삼채와 밥그릇의 용도나 미적가치처럼 개인차에 달렸다. 잘 생각해보라. 아니, 생각 안해봐도 된다. 그건 그쪽 맘이다. 그러니 쓸데 없는 독단과 아집으로 교화하려 들지나 말라. 왠지 어처구니가 광속으로 소실되고 이성이 아폽토시스되어
감성이 저 머나먼 별이 되어 사건의 지평선 넘어로 날아가버리는 느낌이다. [위험분자님의 도덕관의 오류 ]라는 글에대한 답변 글쎄, 글쓴이의 3년전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나의 삼년후는 아니다. 그리고 글쓴이의 모습이야 말로 '사랑중독', '사랑강박증'에 사로잡혔던 5년전의 필자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C.S. Lewis라는 인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자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됐든 중요한 것은 내가 그자 일순 없고 그자도 나일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하등 말할 가치가 없는 쓰잘데 없는 말은 아끼도록하자.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 라는 늙은이의 조언은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짜증만 울컥 치밀뿐이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같은 경험은 하지못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이 예전의 자신들의 모습과 같다고 착각할지라도 세상은 똑같게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런 이유에서도 사람은 남을 이해할수 없다. 오만하기 그지없게 남을 이해하려 들지말것을 권고한다. 아니, 이해한다고 자만하면서 또 다른 세계를 파괴하는 우악스런 짓을 관두라는 말이다. 세계가 하나라고 착각하는 머저리들은 세계란 모든이의 둘레 60cm 무게 1700g남짓한 이 미치도록 작은 기름덩어리에 우겨넣어진, 그 60억여개의 기름덩어리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바란다. 뻔히 저래 나올것 같아서 경고했던것이다. 이렇게되면 누군가의 세계는 부숴진다. 선행이란 자기자신 마저 속아버린 베일로 가려진 파괴를 일삼았던, 본문에도 언급되었던 한 인간의 예는 유명할테지. 더구나 이런 실정이니 교화에는 관심없다는 말로 의심이 간다. '우리 이런말 믿지 맙시다.', '이걸 믿으세요.' 하는 중세 교부철학들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그것보다 대체 어떤 점에서 필자의 언어적, 논리적 헛점을 지적하고 더 낳은, 현상을 잘 설명하는 설명을 내놓았다는 건가? 더구나 글쓴이를 보아하니 어지간이도 현인 추종자인것 같다. 글쓴이가 말하기론 여기저기서 쿼테이션을 따온 필자가 말할은 아닐것 같은진 몰라도, 필자는 현인이라던지의 '추종자'가 아니다. 대현이나 뭐니 해봤자 인류역사 이래로(짐승은 빼자 어차피 교류도 안되는데 세계를 가지던 말던 알게 뭔가.) 수조개는 등장했을 저 미치도록 작은 세계들중 하나에 틀어박혀, 필자나 하나 다를바없이 골통 굴려가며 마스터베이션이나 해댄 인간들일 뿐이다. 그들이 외계나 천계에서 온, 진실을 알고있는 근본적으로 우리랑 틀려먹은 인간들이라고 말하고싶은게 아닐바에는 그들의 말을 따르던 안따르던은 개인의 맘일뿐, 그걸 무슨 세상을 다 잴수있는 위대한 잣대라도 주운냥 찬양해대며 다른 이들의 세계를 깨고 그 속에 쑤셔넣으려는 행동을 볼때마다 역겨움을 느낀다. 더구나 이쯤되면 글쓴이가 그렇게 찬양해 마지 않는 성현의 기준이 뭔지도 궁금해진다. 세계가 60억개이상인 이상 그 안에서 굴러먹는 인간들도 가지가지다. 칸트가 언제부터 대현이나 성현으로 탈바꿈했는가에 대한 소박한 의심은 접어두고 그다지 찬양하고 싶진 않지만 필자와 비슷한 세계관을 지니고도 현인추종자인 인간들이 내세우기 좋아하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를 보자. 물리학, 인간학, 국가론에서 활동했던 인간이지만 일단 필요한 인간학이나 끌어와 보자. 홉스에게 있어서 인간은 이기적(egoistic)이며, 모든 감정의 발로와 의욕은 순전히 그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는 자기보존욕에서 기인하며, 그것은 또 대상에 의해서 규정되며 특수화되고 발현된다. 따라서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동물과 같이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며 발달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이것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의 도덕적 경향이나 애타적 경향 또는 동포의 행복을 위하는 윤리적 경향도 사람의 본성이 아니고, 그 근본인 이기욕이 지혜와 습관에 의하여 변형된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가치도 이 자기보존을 위한 이기욕에서 나타나는 것인 만큼, 여기에 있어서 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다만 사회에 있어서 얼마나 전체적 이익과 관계되느냐 하는데 따라 차이가 생기며, 또 선, 악의 구별도 생긴다. 다시 말해 사회에 필요한 이기욕의 형식은 선이며, 그 반대로 사회에 독을 끼치는 형식은 악이다. 뭔 말인고하면, 한 마디로 이건희가 지 폼 잡으려고 쓰나미 났을때 구원금 보내서 사람 살리는 거나, 테레사수녀님이 예수의 뜻을 따르겠다며 사랑의선교회 활동하는거나 질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건 홉스의 말이다. 필시 이 홉스란 작자도 글쓴이 식의 현인추종자들의 분류에서 대현에 반드시 포함되는 인간이다. 이렇게 배덕의 극을 달리는 작자도 있거니와 이에는 못미쳐도 또 다른 수 많은 미치도록 작은 세계들이 그렇게 돌아감에도 왜 그리 아전인수격으로만 말하는가? 아전인수로 말 끌어쓰면서, 더구나 작디 작기로는 매한가지인, 별 다를바 없는 저런 인간들이 남기고간 잣대를 들고 무작정 달려드는 것을 보면 누가 더 세상을 만만하게 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멋대로 예측해준 그 가설중 첫번째에 관해서, 자타를 불문하고 그 '평가'라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나 알고있는지 의심이 간다. 관념철학에 잠시나마 빠져본 이들은 알겠지만 '사유의 외화'와 '사유의 내제화'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외화되지는 않는 사유는 대외적 의미가 없음은 물론 내제화조차 되지 못하는 사유는 존재할 수 없다. 내제화가 안되는 사유는 엄밀히 말해서 없다. '사유'자체와 모순되게 된다. 글쓴이가 착각하고 있는것이 바로 그점이다. 누군가 선행을 했는데도 필자같은 또라이가 나서서 조소하고 비난한다면 어떨까? 필자를 죽이려드는 경우는 패스하고 대개의 경우 '나는 그래도 내가 한일에 만족한다. 누군가는 내가 한 일을 알고 있을것이다. 최소한 내가 도와준 사람이라도. 아니, 도운 나라도 알고 있잖은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남이건 자신이건 누군가의 평가가 뒤따르기에 행동에 의미가 부여된다. 그것이 필자같은 또라이의 조소건, 글쓴이 같은이의 찬양이건 간에 말이다. 기본적으로 철학의 영역이지만 굳이 끌어내 쓰면 이렇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고지순하신 신의 짓거리를 해대면 어떻게 하실까? 추측이라 옳다고는 할수 없지만 개인적 관심 덕에 수녀님의 어록을 읽어봤으니 어느정도 맞으리라보고, 필시 '그래도 괜찮다. 나는 예수님의 뜻을 행한 것이다.'라고 하셨겠지. 결국 실재의 여부를 떠나서라도 예수님은 알고 계신것이다. 이러한 형태를 가리켜 필자는 '지극히 자위적이고 자기기만적인 프라이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안 하실거다. 오로지 지고지순한 사랑만을 하셨을거다.' 라고 한다면, 글쎄, 자신의 말을 한번 돌아보기 바란다. 필자가 지적한 항목을 제외하고 나면 종교적 의미든지 다른 어떤 의미든지 그 목적론은 소실된다. 설마 저걸 놓고 분석론('과학')으로 논쟁하고 싶다는 것은 아닐테고? 아니면 유일한 방법은 그 지고지순한 사랑의 증명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파블로프의 개가 느끼는 것과 하등 다를바없는 단순한 몽상이라며 그 당위를 묻고있다. 멍청하게 자기언급, 순환논리라는 최저급의 논리모순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두번째 추측에 관해서, 맞다. 지독한 염증을 넘어서 혐오를 느끼고 있으니까. 그런데 의아해진다. 현실이 뭐였더라? 굳이 회의주의까지 끌어들이지 않아도 이미 이글은 충분히 철학판이 됬고, 600년전 유물인 실념론을 들추지 않아도 머저리가 아니라면 '현실'을 논하는 짓은 관두고 싶다. 필자의 언어사용을 지적한것 보니 언어적 소양은 있는것 같지만 비트겐슈타인 자신조차 스스로가 만인의 사전이 되지 않는한은 별수 없는 일이란것쯤 자각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보다 더한 '현실'이니 '생명'이니 하는 것들로 논쟁하고 싶지는 않다. 언급 했듯이 누군가의 세계가 부숴지지 않는한은 불가능하다. 숲과 관련해서, 글쎄 누가 축소론을 펼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필자는 그 행동의 근본을 논하며 대죄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선행의 예를 들면서 논지라고는 찾아볼수 없이 필자의 2살박이 조카가 생떼 쓰듯이 '그게 같을리가 없잖아~' 라고 나오니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아직도 필자의 글에 대한 반박을 읽지를 못했다. 필자 자신과 관련해서 숲은 못보고 썩은 나무만 보고 있을거라는 것, 염세주의는 패배자의 논리라는 것, 난데 없는 기독교 경전, 끝으로 저 글과 같을리 없다. 우리는 저것보다 나을거다.라는 진짜 생떼까지. 대체가 저 장황한 글속에 필자의 글을 반박한거라곤 '그럴리 없다. 같은 범주일리 없다.'를 빼고는 없는걸까? 동의어체계를 필자가 사용했다는데 대체 어디 동의어가 있다는 건가? 탐욕? 위선? 아니, 이 단어들은 원래 뜻으로 제대로 쓰였다. 글쓴이 자신이 풀이한대로다. 필자는 그것을 진짜 탐욕과 위선이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동의어를 써서 필자가 독자를 헷갈리게 한 부분이 어딘가? 필자가 어떡게 그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건가? 다시 한번 궁금해 지는게, 대체 어떤 점에서 필자의 언어적, 논리적 헛점을 지적하고 더 낳은, 현상을 잘 설명하는 설명을 내놓았다는 건가? 언어적이건 논리적이건 결국 필자가 해놓은 해석으로는 사람은 부도덕해지는데 '그럴리 없다. 그런거 싫다.' 라는것 아닌가? 뭐, 읽는 이를 감정적으로 선동하겠다는 건가? "여러분~ 우리 그런거 싫죠? 그럼 그냥 무시하고 틀렸다고 생각해버려요~" 처럼? 차라리 명쾌하게 지적이나 해놓았으면 시원하겠다. 다시 숲 얘기로 와서, 상위 카테고리 즉, 행동의 원인으로 대죄를 제시하고 홉스처럼 그에 따른 다양한 변형의 한가지로 덕목을 말하고 있다. 멋대로 뒤집어 놓고, 덕목을 상위에 놓고 그 하위에 하나하나 대죄를 갖다붙이고 있는것 처럼 말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이 정도면 숲얘기의 실체는 자명하지 싶다. 더구나 또 다시 칸트니 바울이니 하는 결국 일반이나 하등 다를바 없는 인간들을 예로 들면서 많은 주장중에 취사선택을 하라는데, 그래, 그 취사선택이란게 글쓴이의 주장처럼 그저 '그런거 싫어요. 우린 도덕적이예요.' 하는 짓이 허다하기에 필자는 그것을 타락한 면죄부를 얻는 짓거리라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필자같은 족속의 개인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본문에 나온것을 예로 들어 필자가 그다지 꺼리지 않는 것만 말하겠다. 만약 어느 어머니가 아픈 아이를 밤새워 간호한 끝에 병세에 차도가 생긴 것을 두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을 "탐욕" 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정말로 염세주의의 극에 달하여, 해만 뜨면 비 올것을 걱정하는 패배자이겠지요. 라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경우가 저렇다. 댁들이야 어찌 여길지 몰라도, 어찌됐든 필자도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그 근본이야 어찌됐든 말이다. 필자의 어머니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신다. 욕을 해대며 '나는 안그렇다. 나는 고결하다'따위로 지껄이던 그냥 희한한 모자도 있구나 여기던 그건 보는이 맘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경고한다. 세계는 수십억개가 존재한다. 주제넘게 남의 세계까지 부수려들진 말라. 당신에겐 날 일깨워줄(대체 뭘 일깨워 준단건지도 모르겠지만) 의무도 사명도, 의리도, 사랑도 없다. 그리고 댁의 착각이지, 필자같은 족속들도 패배자가 아니다. 필자도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필자가 말해줄수 있는것은 주제넘게 '선행'이란 탈을 쓰고 설쳐대던 인간들중에도 패배자는 극히 많다는 것이다. 보너스>신문지상의 훈훈한 이야기를 보며 눈물 짓는다라... 물론 필자도 인간 육수 제조기가 되어 울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타락한 면죄부가 된다면 눈물따윈 말라버리는게 나을테지. Your face라는 애니메이션의 소개이다. 출처는 한국판 Newtype의 Mapping Animation코너. 살다보면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이해할 수 없을 땐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라고 맘 편히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어떤 일들은 그럴수 조차 없다. 예를 들자면 사랑에 대한 무조건 적인 추종 같은 것이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인본주의의 긍정적 가치들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사랑은 인간 세상의 모든 근심을 덜게 해주는 만병통치약이자 당위성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할 듯한 강박관념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찬가를 들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행복에 가득찬 미소를 짓는 반응이 '정상적'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무엇이나 예외는 있는 법. 이를 거부하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심지어는 정상이라는 규정 자체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빌 플림턴 같은 용감한, 혹은 또라이 기질이 있는 '작자'들이다. 한 중년 신사가 러브송을 부르는 1987년 빌 플림턴의 작품 [Your Face]는 모든것이 뒤틀어진 작품이다. 여자 가수가 부른 노래를 저속 재생하여 남자 목소리처럼 만든 것부터 비딱하기 이를 데 없다.(거기다 제작비가 없어 여자 가수가 불렀다는 핑계를 대는 걸 보면 뻔뻔하기까지 하다.)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찬미하며 변함없이 영원할듯한 사랑을 노래하는 남자의 얼굴은 잠시도 쉬지않고 꿈틀거리고 비틀렸다 쪼개지고 부풀어 올랐다 합체된다. 사랑의 불변성과 인간의 가변성의 묘한 충돌과 조화이기도 한 이 장면들은 어찌보면 사랑 때문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열심히 노래하던 남자를 땅바닥이 변한 얼굴이 삼켜버리는 엔딩을 보면 도저히 '정상'적인 시선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비껴 생각한다면 아주 쉽게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군... 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바로 사랑의 사탕발림이 가증스러우니 닥치라 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보면 사랑이 사탕발림에 불과하게 보이는 것일까? 빌 플림턴에게 물어볼 수도 없지만 물어봐야 면박만 당하지 싶으니 맘대로 생각해 보자.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초적으로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니 백인백색으로 같을 수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사랑이 사회적으로 외면화될 때 가치를 부여받을수 있다면 그것은 적극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적극성은 필연적으로 행동을 수반하게 되고 행동은 권력에 영향을 미쳐 사회를 변화시킬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 난 더 이상 외롭지 않아...등등 운운하며 자족적차원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낯간지러운 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데 나는 돈이 좋아. 돈이 많으면 너무 행복해, 라고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은데 그것을 교묘하게 아름다운 척 위장하고 있으니 어찌 가증스럽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듯 싶다. 이 이후로는 빌 플림턴의 소개와 개인전이 있다는 얘기니 이하 생략...궁금하면 사서 읽도록. 필자같이 이런 영화에 환호하는 작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P.s한가지 덧붙여 다시 말하자면 '역시 내 이럴줄 알았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경고했건만 결국은 이런식으로 나오는군 하는 생각이다. 결국 필자가 역겨워 마지않은 밤꽃내 철철나는 자위성 글에다 더구나 수음는 골방에서 혼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음 방식을 권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불쾌하다. 이 글을 읽어내려오면서 불쾌했다면 자신의 글을 한번 돌아보라. 국어사전 한번 안들춰본 패배자로서 해주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라는 말 함부로 쓰지 말기를. 세상 사람이 다 댁 같은 것도 아니고, 각자 다들 작디 작은 세계에 처박혀들 지내고 있으니까. ![]() 아아........이런...... 괴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더구나 요즘 왜이리 안그려질까?..... 그리기가 싫어서 그런가........ Lord Of The Rosary 작업도 본격적으로 착수 해야하는데.... 그나저나 장기라곤 해도 언제쯤 완성 시켜질지.... 맘만 급하군..... |